Ran
亂
구로자와 아키라
나카다이 타츠야, 테라오 아키라
그린위치 필름 프로덕션즈
프랑스, 일본
160분
드라마, 액션
2004.04.16
1600년경부터 시작된 셰익스피어의 비극시대는 엘리자베스 여왕 말기의 정치적 사건에 영향을 입은 바가 큰데, 구로사와 아키라가 컬러영화로 진입하던 시기는 공교롭게도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어두운 모습으로 변화하던 그 당시의 상황과 비슷하다. 영화제작이 힘들어지면서 작가로서의 자존심이 상한 구로사와가 자살을 시도하기에 이른 1970년대는 그에게 있어 가장 끔찍한 시절이었다. 다행히 <카게무샤>와 <란>으로 다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지만 상처받은 그의 영혼은 두 작품에 고스란히 담기게 된다. <리어왕>의 글로스터가 ‘광인이 맹인의 손을 이끄는 것이 이 시대의 저주다’라고 말하고, <란>의 이치몬지 영주는 ‘모든 게 끝이다. 이 세상은 의리도 정도 없는 곳이다’라고 부르짖는다. <란>은 구로사와가 <거미집의 성>에 이어 다시 셰익스피어와 조우한 작품이다. 두 노쇠한 남자를 중심에 두고 이중구조로 전개되는 <리어왕>과 달리 <란>은 권력을 잃은 영주와 그의 가족 그리고 그에게 부모를 잃은 오누이에게 따로 초점을 맞춘다. 구로사와는 <란>을 통해 내면의 이야기와 보편적인 주제를 동시에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죽어가는 노인이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할 때, 가파른 성벽 위에 선 맹인은 인생의 무상함을 맛본다. 성벽 아래로 떨어지는 부처의 족자가 상징하듯이 구원의 길은 보이질 않고, 후회는 언제나 늦게 찾아오는 법이다. 만약 구로사와의 작품에서 고통이 더 느껴진다면, 그건 마흔 무렵의 셰익스피어가 간접적으로 느낀 충격을 칠순의 구로사와는 직접 고뇌하고 승화해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란>을 스펙터클의 향연으로 볼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종종 오해되는 것처럼 <란>은 70mm 필름으로 찍힌 영화도 아니다. 도호스코프로 활극을 찍던 구로사와는 정작 컬러시대 이후에 액션장면을 찍을 땐 대략 1.85:1의 화면비율에 해당하는 비스타비전 포맷을 더 선호했다(두편의 드라마 <데르수 우잘라>와 <꿈>은 반대의 경우다). <란>의 역동성은 <7인의 사무라이> <거미집의 성> <숨겨진 요새의 세 악인>의 연장선상에 놓인 것이며, <란>과 <카게무샤>에서 구로사와가 더욱 신경 쓴 부분은 엄격한 구도와 그에 입혀진 컬러로 생각된다. 프랑스와 일본의 합작영화였던 만큼 DVD 또한 두 나라에서 나온 것이 가장 우수하다고 알려진 반면, 미국 출시본은 화려한 외양에 비해 본편의 화질은 뛰어나지 않다. 국내에서 출시된 <란> DVD는 (재생시간을 감안하면) PAL지역의 마스터를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의외로 화질이 우수하다.
일본 전국시대, 어느덧 노인이 되어버린 성주 히데토라는 어느날, 아들들을 데리고 한낮의 사냥을 마치고 즐기다가 낮잠에 든다. 홀홀 단신으로 자신의 곁에 아무도 없다는 꿈을 꾼 그는 큰 결심을 한다.
히데토라는 아들들에게 각각 화살 하나씩을 주고 부러뜨려 보라고 하고 화살은 쉽게 꺾인다. 그러나, 세개의 화살을 한꺼번에 꺾기는 힘듬을 알려주고, 세 형제가 힘을 합쳐 나라를 이끌어 가라고 한다. 그는 세 아들에게 3개의 성을 각각 나눠주고, 첫째 타로에게는 장남이기에 가문을 이끌도록 한다. 둘째 지로와 셋째 사부로에게도 성을 하나씩 주고 자신은 성주의 칭호와 지위만 유지한채 세 아들의 성을 돌아다니면서 살겠다고 한다. 두 형제는 기뻐하지만, 막내인 사부로는 오히려 화를 낸다. 의리도 정도 없는 이 세상에서 왜 자식을 의지하겠다는 생각을 하나며 아버지에게 화를 내고, 삼형제가 서로를 피로 물들일 거라는 예언을 한다. 이에 크게 화가 난 아버지는 사부로를 내치고 다시는 아들로 치지 않겠다고 한다. 첫째 아들 타로가 가업 승계 축하연을 열고 그곳에 참석한 아버지는 심한 모욕을 당한다. 아버지의 부하가 자신을 무시했다며 장남인 타로는 아버지에게 앞으로 자신의 말에 복종하겠다는 서약문에 피로 혈장을 남기라고 한 것이다.
이치몬지는 자신이 성주의 칭호와 지위를 유지하겠다는 것을 잊었냐고 하지만, 타로는 자신에게 가문을 물려주지 않았나며 대들고 결국 히데토라는 심하게 화를내며 다시는 타로를 보지 않겠다고, 둘째 지로의 성을 찾아간다. 그러나, 이미 지로도 아버지를 섬길 마음은 없고 형의 지위를 차지할 궁리를 하고 있었다. 결국 아버지의 호위군사를 칠 생각까지 한 지로의 성을 찾아간 히데토라는 지로이 이야기에 놀라서 성을 떠나게 된다. 갈곳도 없고 먹을 것도 없게된 히데토라는 이제서야 자신이 다시는 안보겠다고 한 막내 사부로를 생각하지만, 사부로는 이미 그곳을 떠나고 없는데.
전 세계의 고전영화 마니아들이 손꼽아 기다리던 <란: 크라이테리언 컬렉션>(크라이테리언 일련번호 316)이 지난 11월 22일에 발매됐다. 앞서 발매된 <카게무샤>(2005년 3월 발매)가 ‘역대 크라이테리언 발매 타이틀 중 최고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지라, <란>에 거는 팬들의 기대는 가히 ‘측정 불능’의 수준이었다. 과연 이번 <란> 역시 <카게무샤> 정도의, 아니 그 이상의 출중한 완성도를 지니고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Yes!’이다. 약간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크라이테리언이 앞서 발매한 <카게무샤>는 이번 <란>을 위한 ‘거대한 예고편’이었다고까지 볼 수 있다. 한 마디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스스로 “내 일생일대의 역작이며, 나의 ‘유언’과도 같은 영화”라고 칭한 작품에 어울리는 ‘명품 DVD’이다.<카게무샤>때도 그랬듯, 본 타이틀을 보다 재미있게 감상하기 위해서는 영화에 관련된 몇 가지의 배경지식을 미리 ‘예습’해둘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과는 달리 <란>은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일본식으로 각색한 작품’이 아니다. 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아키라 감독은 자신이 이전에 구상한 전국시대 영주의 이야기를 보다 흥미진진하고 극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리어왕>의 플롯을 차용한 것이다. 즉, <란>은 처음부터 ‘<리어왕>을 일본식으로 개작한 작품’이 아니라 ‘일본 작품에 <리어왕>의 구조를 도입한 것’에 가깝다. 따라서 (서양 희곡을 각색한 작품답지 않게) 영화의 플롯 전반에 일본식 정서가 뿌리 깊게 배여 있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영화를 보신 분들은 할리우드 산 스펙터클 영화에서는 좀처럼 맛보기 힘든 ‘불가사의한 연극적’ 색체를 뚜렷하게 느끼셨을 터, 그 원인 역시 바로 여기에 있다. 즉, 아키라는 서양영화의 문법이 아닌, 일본 노극(能劇) 및 민속극의 형태를 빌려 <란>의 스타일을 구축해 나간 것이다.
아키라는 이미 <카게무샤>를 통해 ‘동양식 컬러 영화 미학’의 정수를 구현해 세계를 놀라게 한 바 있다. 하지만 후속작인 <란>에서 그는 전작의 아성마저 무너뜨리게 된다. 전술했듯, <란>은 <카게무샤>와는 달리 ‘판타지적’ 색체가 강한 영화다. 따라서 <카게무샤>에 비해 색감이 보다 다채롭고 초현실적인 느낌을 띤다.특이하게도 이 영화에는 클로즈 업 신이 거의 없다. 대부분의 신은 롱 쇼트와 익스트림 롱 쇼트로 구성돼 있으며, 일반적으로 ‘클로즈 업’으로 찍혀야 할 장면들이 <란>에서는 ‘미디엄 쇼트’로 표현됐다. 아키라가 이런 극단적인 스타일을 택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을 두 가지 들면, 다음과 같다: 1. ‘좀도둑의 시선’에서 주요 사건이 전개되는 <카게무샤>와는 달리 <란>은 ‘전지적 작가 시점’이 주를 이루는 영화다. 즉, 아키라는 하늘에 있는 신(神)이 지상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을 부여하기 위해 이런 스타일을 택한 것이다.
<카게무샤>(이 영화는 당시만 해도 일본 영화사상 가장 많은 제작비가 투입된 작품이었다)를 능가하는 ‘부담스러운’ 스케일 때문에, 오랫동안 <란>의 제작은 지연될 수밖에 없었는데, 프랑스인 제작자 세르쥬 실베르만이 ‘물주’를 자처하며 나서면서 극적으로 영화 제작에 청신호가 켜졌다. 당시 아키라는 <란>의 제작 총 지휘를 맡은 하라 마사토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건내며 <란> 프로젝트에 관한 집착을 원색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나에게 있어, <카게무샤>는 <란>을 만들기 위한 ‘연습 과정’이었소. <란>은 나의 일생일대의 역작이 될 것이오!”스스로 ‘드림 프로젝트’라고 칭한 작품인 만큼, <란>을 제작하며 아키라는 어느 때보다도 철저하게 사전 준비를 했다. 아키라의 연출 스타일은 매우 독특하다. 그는 촬영에 앞서 수없이 많은 리허설 과정을 거치지만, 정작 본 촬영은 모든 것들이 갖추어진 상황에서 ‘단칼에’ 끝내곤 한다. 일생일대의 ‘매머드급’ 영화였던 <란>에서, 그의 이런 작업 패턴은 완전하게 확립됐다. 머리 속에 그린 것들이 찰나의 영감을 매개로 카메라에 포착되는 순간을 그는 절대 놓치지 않으며, 배우와 스탭들에게 그 영감을 고스란히 전달하는 노하우 역시 탁월하기 이를 데 없다.
남의 글과 영화평을 모두 옮겨다놓는다.
멋진 글들이다.
실감나는 평을 쓸 자신도 없거니와 시간도 늘 모자란다.
두번을 보면서도 지루하지 않았는데 인생이란 연극 한편을 관조자의 위치에서 즐기는듯한 널럴하다고 해야하나
요즘의 폭력 영화와는 그 느낌이 확실히 다른데 폭력영화를 볼때 마치 내가 주인공인듯한 스릴을 느끼는데 비해
이 영화는 제 3자의 여유로움으로 즐길수 있다는것.
주인공의 의상이나 분장또한 서양풍이 은근히 드러나는 묘한 느낌이었다.
시작과 동시에 세익스피어의 희극 '리어왕'이 금새 떠오를 정도로 그 쪽에서 약간의 모티브를 가져왔구나했는데 역시였다.
일본은 역시 '선진국이구나'하는 탄사도.
끝무렵 예측을 불허하는 허망한 결과에 내 마음까지 나락으로 내려앉는듯
결말이 그렇게 날것이란 예상은 정말 못했다.
막내 아들과 아버지의 평온한 부자간의 대화를 볼생각에 혼자 흐뭇했었는데
느닷없는 사부로의 사망이라니...
너무하다 너무해. 나도 악을 쓰고 싶었는데 영화속의 그가 내 대신 神께 악을 썼다만
그것은 신께서도 원치않는 결말이라는 說자의 말씀에 끽소리 못하고 고개숙이고 말았다.
바로 인간 스스로가 불러온 재앙이라는것 어찌 인정하지 않을소냐.
인간 만사 쇄翁之馬라 겨우 백년도 못다살것을 웬 욕심은 그리 부리는건지
영화 한편 보고 땅이 꺼지라 한숨쉬고 숙연해진 나도 참 여리다 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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