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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한 영화

보고싶어도 볼수 없는 영화, '밀레니엄'

[강소원의 시네 에피소드] '밀레니엄'서 빠트린 것

 

지난해 봄, 스티그 라르손의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밀레니엄' 시리즈를 읽고 어찌나 열광했던지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이 지면에서 다룬 적이 있다. 영화화될 가능성이 높은 소설이지만 차후에 누가 만들든 영화라는 말랑말랑한 매체는 극단적으로 격렬한 이 소설을 제대로 다룰 수 없을 것이라는 투의 얘기를 했던 것 같다. 그 글을 쓰고 한 주도 지나지 않아 이미 스웨덴에서 이 시리즈를 완성해 개봉했다는 사실과 할리우드도 영화화 작업에 착수했음을 알고 혼자 무안해져 얼굴이 화롯불처럼 타올랐던 기억이 있다. 아, 과문한 것도 죄다.

하지만 그 소식을 접하고서도 내 생각의 본류는 바뀌지 않았다. '그 소설의 영화화 작업은 무리라니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감독이 데이빗 핀처라는 점. 지독하게 어둡고 비관적이며 불쾌할 수도 있는 소재를 물타기 하지 않고 정공법으로 혹은 스타일리시하게 다룰 수 있는 할리우드에 현존하는 거의 유일한 감독. '파이트 클럽', '세븐', '조디악', '소셜 네트워크'에서 확인된 바 있듯이, 데이빗 핀처는 실패하기가 성공하기보다 더 어려운 감독이다.

과연 핀처의 '밀레니엄-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은 매혹적이었다. 여기서 그는 원작의 이야기를 겸허한 태도로 따르면서 희귀한 매력을 내뿜는 캐릭터 중심의 탁월한 장르영화를 뽑아냈다. 하지만 핵심적인 뭔가가 빠졌다. 원작을 읽지 않았더라면 생각지도 않았을 결여. 말하자면 핀처의 '밀레니엄'에는 라르손의 원작에 세밀하게 기입된 사회정치적인 맥락이 거의 삭제돼 있었다. 그 결과, 진보정당이 이끄는 다문화주의 복지국가 스웨덴의 추악한 이면을 들추어내면서 작가 라르손이 느꼈던 분노와 비판 또한 희미해졌다. 그것은 이 영화의 흠일까, 아니면 영화라는 매체가 안고 있는 한계일까.

여기서 잠깐, 지난해 7월 전세계를 충격에 빠트린 노르웨이의 테러사건이 소설 '밀레니엄'의 컨텍스트를 가늠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무슬림 이민자들에 대한 증오로 노르웨이 정부 청사에 폭탄 테러를 가한 후 캠핑을 즐기던 아이들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기를 난사해 77명의 인명을 앗아간 브레이빅의 학살극. 그는 북유럽 나치즘 영웅주의의 잔재를 보여주는 끔찍한 예다. 라르손의 원작에 새겨진 스웨덴 극우파들도 이에 못지않다. 관용과 개방, 다양성을 지향하는 북유럽 사회에 암세포처럼 퍼져있는 나치즘, 인종주의, 남성우월주의에 대한 비판과 분노는 그리하여 소설 '밀레니엄'의 배경이자 주제가 됐다.

핀처는 이 고유한 맥락을 대단히 보편적인 배경으로 간단하게 처리해 버렸다. 다소 실망스러웠지만 어쩌면 현명한 선택이었는지도. 어떤 관객이 장르영화에서 그런 무겁고 장황한 사회비판을 기대할까. 10부작쯤 되는 시리즈로 만든다면 가능할지도 모를 일이다.

말하고 보니 원작 소설과 함께 스웨덴과 할리우드에서 이제 막 도착한 영화들이 지금 벌이고 있는 '밀레니엄' 3파전에 머리가 어찔해진 나머지, 핀처의 영화에 매혹되고도 단점만 부각시킨 셈이 되었다. 문자언어와 영상언어 간의 승패를 가리려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제각기 뛰어난 이 작품들을 온전하게 즐기기 위해 순서에 유의해보면 어떨까 한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당신이 아직 '밀레니엄'의 세계에 들어서지 않았다면 먼저 영화를 본 후 원작을 접하기를 권하고 싶다.

영화평론가·부산대 영화연구소 전임연구원

 

강소원님의 이 글을 읽고  '소설을 먼저 읽고 나니 부산에서는  벌써  상영을 끝냈다.

정말  속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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