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스크랩

계란 한판. -고 영민-

 

 

 

 

 

계란 한 판

           - 고 영 민 -

 

대낮, 골방에 처박혀 시를 쓰다가

 

 

문 밖 확성기 소리를 엿듣는다

 

 

계란…(짧은 침묵)

 

 

 

계란 한 판…(긴 침묵)

 

 

계란 한 판이, 삼처너언계란…(침묵)…계란 한 판

 

 

이게 전부인데,

 

 

여백의 미가 장난이 아니다

 

 

계란, 한 번 치고

 

 

침묵하는 동안 듣는 이에게

 

 

쫑긋, 귀를 세우게 한다

 

 

다시 계란 한 판, 또 침묵

 

 

아주 무뚝뚝하게 계란 한 판이 삼천 원

 

 

이라 말하자마자 동시에

 

 

계란, 하고 친다

 

 

듣고 있으니 내공이 만만치 않다

 

 

귀를 잡아당긴다

 

 

저 소리, 마르고 닳도록 외친다

 

 

인이 박여 생긴 생계의 운율

 

 

계란 한 판의 리듬

 

 

쓰던 시를 내려놓고

 

 

덜컥, 삼천 원을 들고 나선다

 

 

- 시집 ‘악어’(실천문학사) 중에서

 

 

인이 박인 생계의 운율을 지닌 이, 계란장수뿐이겠는가.

 우리 동네엔 ‘꿀, 꿀, 꿀, 상주 꾸울 참외가 왔습니다.

 

삼천 원에 한 보따리씩 들여가세요’ 듣기만 해도 군침이 절로 도는 참외장수가 있고, ‘고등어가 왔어요, 갈치가 왔어요,

 

 동해바다가 통째로 왔어요’ 외치는 확성기 음유시인도 있다.

 팍팍한 생계가 가락이 되도록 얼마나 제가끔 마르고 닳았을까.

 

 저 소리 알아듣는 시인의 귀도 예사롭지 않다. 어떤 이들에겐 성가신 소음에 지나지 않았을 터. 시인의 첫 시집 ‘악어’는 시종 능청스러우면서도 서늘하다.

 

 이 가을, 우리 시단은 ‘내공이 만만찮은’ 새 시인 하나를 갖게 되었다.

 

 

시인 반칠환

-동아일보에서 발췌-

 

그러네. 무심코 들어넘기든 그 운률 문득 생각하니 나도 조금은 그랬던거 같다. 계란.하고 침묵하면 귀를 기울인다. 다음의 말이 뭘까.   두 글짜. 살짝 찝어 내어 잔칫상으로 벌려놓는 시인은 마술사.

 

 

 

 

 

 

 

 

'스크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팝송 - 애청곡의 역사  (0) 2005.12.09
내가 좋아하는 우디 엘런.  (0) 2005.10.02
하나님 놀다 가세요  (0) 2005.09.23
자화상.(自畵像)  (0) 2005.09.15
閑山島 夜吟.(한산도 야음)  (0) 2005.0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