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자이너 모놀로그'
밑의 글은 작년 윤홍경숙씨가 쓴 글을 가져왔다.
사실 내 입으로 보지라고 쓰기가 좀 힘들어서 그렇다.
이달 12일에 서울에서 또 그 공연을 한단다.
서주희씨의 일인극으로 . 부산에서 라면 한번 보겠는데 말이지
사실 그 말이 왜 욕설로 변신을 했을까. 올해의 공연중에는
더욱 대담하게 보지를 논한다고 한다.
그리고 관객에게도 합창으로 외치게하고 사행시도 짓고. 연극 도중에 그말이 스므번도 더 나온다니 대담한 시도지만 때 늦은 감이 없지않다.
얌전한 남성이 질겁을 하지나 않을까 모르겟지만 우리도 알것은 알아둡시다.
2003년'버자이너 모놀로그' 를 보고.
윤홍경숙 씀.
이번에 서울에서 '버자이너 모놀로그' 일명 '보지의 독백'을 보게 되었다.
'보지'를 소리내어 말한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그런 '보지'를 제목으로 정할 정도면 '여성의 몸을 긍정해야 한다'는 전투적이고도 실천적인 이야기가 쏟아지거니 예상했다
. 아니면 야하고도 질펀한 성에 대한 이야기겠거니 예상했다. 그런데 나의 예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 연극은 이 땅에 살고 있는 여성들에게 바치는 찬사였다.
또한 나의 몸, 여성들의 몸을 위한 긍정과 자기 치유가 가능한 작품이였다. 이 극은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이 등장하고 '보지'를 통한 자신의 경험을 소리내어 말함으로서 나와 여성들, 관객들과 소통한다.
'보지'에 대한 다양한 경험은 곧 나의 경험이 되고, 여성들의 목소리가 되며, 관람객의 문제가 된다. 여성의 몸 특히 여성의 성기 '보지'는 부끄럽고, 음침하고 그리고 여성 스스로가 몸에서 잊혀진 장소로 치부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것은 여성 스스로가 만든 것이라기보다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을 통제하기 위한 여러 가지 장치 중에 가장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이기도 하다.
이런 '보지'에게 정확한 이름으로 불러주는 것은 자기 정체성을 찾게 하는 것이요. 경험 나눔은 개인의 느낌이나 생각으로 멈출 수 있는 것을 여성 모두의 경험으로 엮어가는 것이요.
주체적이고 긍적적인 에너지로 전환하는 과정인 것이다. 이 연극은 나의 보지 저 밑으로부터 따뜻한 그 무엇인가가 피어올라 그 기운이 몸 전체로 퍼지는 황홀한 경험이었다.
나를 구성하는 나의 몸은? 특히 나의 보지는? 내 보지에 어떤 방식으로 말을 걸 것인지 아직 모르겠다.
우선 정확한 이름으로 되내이는 것부터 시도해볼까나. 자그마하게 되내어 본다. 보지, … 나의 보지
올해의 공연을 보고는 어떤 감상문이 올라올까 조금 궁금하다.